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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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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소1동

농소1동은 신라시대 율포현(파사왕 때:80년 ~ 112년)지역으로, 경덕왕 16년(757년)에 동진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흥려부(일명 흥례부)에 통합(태조 23년 / 940년)되면서 개국공신 박윤웅의 식읍지(食邑地)가 되어 농소(農所)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겼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울산군 농소면이 되었고, 순조 20년(1820년)에 어련천(현재의 동천강)을 경계로 동쪽은 농소면, 서쪽은 수서면으로 분면되었다.
고종 31년(1894년) 농소면이 농동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농동면과 농서면을 통합하여 농소면(호계·창평·매곡·신천·중산·시례·상안·천곡·달천·가대·화봉·송정리)으로 개편하였다. 1917년 10월 1일 제령 제1호(면제시행-1917년 6월 9일 공포)에 따른 면제(面制)시행으로 면에 직원을 두고 사무를 처리하게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지방자치단체가 되어 1952년 4월 25일 초대 농소면의원 13명이 선출되어 면자치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8월 8일 제2대 면의원(13명) 및 초대 면장, 1960년 12월 19일 제3대 면의원(11명) 및 12월 26일 제2대 면장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5·16직후인 1961년 9월 1일 읍·면자치제가 폐지되면서 군이 자치단체가 되고, 읍·면은 단순한 군의 하부기관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설치로 송정·화봉리가 울산시에 편입되고, 울주군 농소면이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울주군의 명칭 변경에 따라 울산군 농소면,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울주군 농소면, 1995년 3월 2일 농소읍으로 승격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가 신설됨에 따라, 농소읍이 농소1·2·3동으로 개편되었다. 동천강과 매곡천을 경계로 농소1동을 설치하여 창평·호계동 전 지역과 매곡·신천동 일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동사무소는 농소 2동과 함께 구(舊) 농소읍사무소를 사용하게 되었고, 1998년 11월 농소 2동사무소는 신천동으로 이전하였다.

창평동

옛날 군대의 창고가 있었다하여 ‘창평’,‘창들’이라 하였다. 창평에는 차일마을과 원지마을이 있다.
창평동 지명유래
고북개「고불고개·구불고(狗不顧)」 책골 서북에 있는 마을. 고불고불한 길이 있는 고개 밑이 된다.
배배랑재「배비랑재·밸방재」 소미기에서 강동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벼랑이 있다.
소미기 호암 동남에 있는 마을. 옛날에 목장이 있었다.
원지(院旨) 「원말」 창평동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에 원이 있었다.
참새골 지금의 원지원 부근인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참새가 많이 날아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차일(次日) 창평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책골 창평동에 있는 마을. 옛날, 서당이 있었다.
칼등만딩이 도둑골 동쪽에 있는 고개. 재가 칼등처럼 가파르다.
호암(虎岩)「범바우」 원지 서에 있는 마을. 범처럼 생긴 범바우가 있었는데, 지금은 땅 속에 묻혔다.
황새골 차일 동쪽에 있는 골짜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황새가 많이 날아들었다.

호계동 (虎溪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성·괴정·수동리를 병합하여 호계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지금 호계역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서, 마을 동쪽에 호랑이 모양을 한 봉우리가 있고, 여기에서 흐르는 시내가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농소1동주민센터 , 울산중부경찰서 농소지구대, 농소중학교, 농소초등학교, 호계초등학교, 호계역, 호계우체국, 농소농협, 호계장 등이 있다.
호계동 지명유래
당수골 「당숫골」 홈골 북쪽에 있는 마을. 당수나무(둥구나무)가 있었다.
동대산 호계동과 대안동에 걸쳐 있는 443.9m의 산 . 「대동여지도」와 「청구도」에는 ‘봉서산’으로 되어 있다.
매매이「매모골·개미골」 홈골 서북에 있는 골짜기. 개미가 많다.
범의등 「복호등」 홈골 동남에 있는 골짜기. 범이 있었다 한다. 풍수지리상 복호혈이 있다고도 한다.
수박곡 「수박골·숲밭골」 호계동에서 중심되는 마을. 수박을 많이 심었다.
수동 「갱생부락」 수박골 동쪽에 있는 마을.
시장 「장태」 호계장이 있는 마을.
홈골 「호곡·홍골」 홈골 「호곡·홍골」 - 호계동에 있는 마을. 옛날 홈이 있었다.

매곡동 (梅谷洞)

1914년 행정구역이 합쳐질 때에 마동·신기리와 함께‘매곡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으며, 조선시대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성지의 비설 매화락지의 혈을 가진 곳이라 하여 매곡이라 하였다 한다. 매곡지방산업단지가 있다.
매곡동 지명유래
괴정 옛날 매곡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큰 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마동(麻洞) ‘봇골’,‘삼밭골’이라고도 하는데, 삼밭이 있어 유래되었다.
신기(新基) 새로운 만들어진 마을이란 뜻으로‘새터’라 부르기도 한다.
신흥재(괴정재) 매곡동에서 대안동 신흥사로 넘어가는 재(고개).

농소2동

농소2동은 북구 신설 이전까지는 농소 1동과 같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가 신설되어 농소읍이 농소1·2·3동으로 개편되면서 동천강과 매곡천을 경계로 북쪽지역을 농소 2동으로 개편하였다. 매곡·신천동의 일부와 중산동 전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주민센터는 농소 1동과 함께 구(舊) 농소읍사무소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1998년 11월 31일 신천동 203-2번지 구 냉천회관으로 이전하였으며, 같은 자리에 청사를 새로지어 2001년 6월 13일 신청사 개소식을 가졌다.

신천동 (新泉洞)

크고 찬 샘이 있었어 찬새미, 찬샘 또는 하천, 냉천이라 하였는데, 후에 신천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제내리·약수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천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농소2동주민센터가 있다.
신천동 지명유래
갈밭 신천동에 있는 마을. 옛날 갈밭이 있었다.
냉천「참새미·찬새미·한천」 신천동에 있는 마을. 옛날 이 마을에 물이 찬 샘이 있어 부임하는 울산부사로서 이 물을 먹고 가면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 한다.
신천천 신천동 앞에 있는 내.
제내「못안」 신천동에 있는 마을. 옛날 앞에 못이 있었다고 한다.

중산동 (中山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원·화정·약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중산의 이름을 따서 중산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치술령 망부석에서 시작하여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망화리·이전리, 범서면 척과리·두산리, 천곡동·중산동을 지나 강동동 대안마을에 이르는 12km의 관문성(70쪽참조)이 있으며, 약수·화정·이화·갓안마을이 있다. 이화중학교, 약수초등학교, 메아리동산, 기적의도서관 등이 있다.
중산동 지명유래
가단「갓안」 이원 북에 있는 마을. 말림갓 안쪽이 된다.
기배깃재「기박현」 약수 동북에서 대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세부측량때 기를 꽂았다.
약수「약물탕」 중산동에 있는 가장 큰 마을. 마을 뒤 산골 모래땅 속에서 약물이 솟아나는데, 맛이 매우 좋고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
이원「이화」 화정 서에 있는 마을. 선조때 원(院)이 있었다. 환생암의 전탑터가 있다.
화정 약수 서북에 있는 마을.
돌티미 중산동 입구 한독골 뒤에 있는 돌이 많은 골짜기. 지금은 논밭이 많이 있다.
머어밭골 바람골 북동에 있는 골짜기
바람골 중산동에 있는 골짜기. 바람이 세다.
석갓「섶갓」 중산동에 있는 산. 섶나무가 많았다.
움바우산 이원 북동에 있는 바위가 많은 산.
회양골 돌티미 북에 있는 바위가 많은 골짜기. 해볕이 잘 든다.
활산정(活山亭) 중산동에 있는 정자. 최주남(崔柱南)이 독서하였다.

농소3동

농소3동은 농소1·2동과 같이 신라시대 율포현(파사왕 때 / 80년 ~ 112년)지역으로, 경덕왕 16년(757년)에 동진현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는 흥려부에 통합(태조 23년 / 940년)되어 개국공신 박윤웅의 식읍지가 되면서 농소(農所)라는 말이 처음으로 생겼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에 울산군 농소면이 되었고, 순조 20년(1820년)에 농소면이 어련천(현재의 동천강)을 경계로 농소·수서면으로 분면되어 오늘날 농소3동은 수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면사무소는 상안에 있었다. 고종 31년(1894년)에는 수서면이 농서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4월 1일에는 농동면과 농서면을 통합하여 농소면으로 개편하였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설치로 송정·화봉리가 울산시에 편입되고, 울주군 농소면이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울주군 명칭변경에 따라 울산군 농소면,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울주구 농소면, 1995년 3월 2일 농소읍으로 승격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가 신설됨에 따라, 농소읍이 농소1·2·3동으로 개편되었다. 동천강을 경계(서쪽지역-구 농서면)로 하여 농소3동으로 설치하여 시례·상안·천곡·달천·가대 등 5개 법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동사무소는 상안동 371-6번지에 임시건물을 지어 1998년 7월 18일 개청식을 가졌으며, 현재 신답로 77(상안동 380번지)에 신청사를 새로 지어 2002년 12월 22일 개소식을 가졌다.

시례동 (時禮洞)

땅 모양이 시리(시루)처럼 생겼다하여 시리 또는 시례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시례·창좌리와 동산리, 오정리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시례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창좌·시례·새터마을이 있으며, 모양이 범의 머리처럼 생겼다는 호두산이 있다.
시례동 지명유래
새터 주연 동남에 새로 이룩된 마을.
시천재(詩川齋) 시례에 있는 화암(花岩) 윤홍명의 재실.
안시례 안쪽의 위치는 시례를 말함.
바같시례 바같쪽 시례
주연동(周淵洞) 가대, 약사, 시례 3개 리동에 걸쳐있던 마을
창좌 시례 동북에 있는 마을. 옛 군창(軍倉)의 왼쪽이 된다.
호두산(虎頭山) 시례 남쪽에 있는 산. 모양이 범의 머리처럼 생겼다.

상안동 (常安洞)

지형이 코끼리 눈처럼 생겼다하여 상안(象眼)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상안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농소3동주민센터, 농서초등학교, 홈플러스 등이 있다.
상안동 지명유래
깔배기 동산 서쪽에 있는 마을.
동산 동산 밑에 있는 마을.
상투뱅이 상안동에 있는 산. 상투처럼 생겼다.
신답 상안동에 있는 마을. 새로 친 논이 있었다.
양지마을 신답 서북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
음지마을 상안 서에 있는 응달진 마을.
찜떡골 상안 서남에 있는 마을. 옛날에 홍수가 졌을 때 다른 곳은 모두 물에 잠겨 버렸고, 이 마을의 뒷산 꼭대기에 찜떡(시루떡) 하나 놓을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한다.

천곡동 (泉谷洞)

물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하여 천곡 또는 새미실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속도리·저전리를 병합하여 천곡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으며 대단위 아파트 등 북구 최고의 주거지로 각광 받고 있다.
천곡동 지명유래
가재골 천곡동 뒤에 있는 골짜기. 가재가 많았다.
굼마을 천곡동에 있는 마을. 구석진 곳(굼턱)에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
분통골 굼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 분토(粉土)가 난다.
속심이(속도) 천곡동에 있는 마을.
순금산 북구 천곡동과 경주시 외동읍에 걸쳐있는 293m의 산. 일명‘순등산’,‘북 신선암’이라고도 부른다.
오산곡(오산골) 천곡 북쪽에 있는 골짜기.
제전(저전) 천곡동에 있는 마을. 닥밭이 많았다.

달천동(達川洞)

달내 또는 달천(쇠를 달구는 곳이 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이다)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달천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달천농공단지와 달천운동장으로 새로운 도시기반을 만들어 가고 있는 지역이다.
달천동 지명유래
달천산 달천동에 있는 산(120m)으로 일명 망제산으로도 불린다. 질이 좋은 철이 많이 나서 삼한시대 변한의 쇠를 동예와 왜에서도 무역해 갔다고 한다. 인조 때(1623~1649) 구충당 이의립이 병농을 위해서는 철로 된 풍부한 무기와 농기구가 필요함을 통감하고, 철광을 찾으려는 일심으로 전국 산천을 헤매다가 이곳 달천산과 충주의 달천산에서 무쇠를 발견하여 비변사에 바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서 철산을 나라에 헌납한 공로로 그에게 상을 내리었다. 한말에는 달천동에 있던 수철광석을 참나무가 많은 언양면 대곡리 한실까지 운반하여 쇠로 만들어 장생포항 화륜선에 실어 일본으로 수출했다고 한다.
만리성터 달천 서북에 있는 성터. 신라때의 관문성이 있는데 1970년대에 복구하였다.
만석골 달내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만석꾼의 논이 있었다.
상아산 달천동과 범서면 두산리 경계에 있는 산(높이 226m)
쇳골 달천광산 옆에 있는 마을. 쇠가 나는 곳이란 뜻이다.
진덕골(진득곡·진등곡) 달내에 남아 있는 마을. 진(긴)등 밑이 된다.
천마산 달천동, 천곡동과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석계리 경계에 있는 산(높이 303m)

가대동 (加大洞)

울산군의 북편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가대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오정리를 병합하여 가대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
가대동 지명유래
가 동 가대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가 서 가대 서쪽에 있는 마을.
미륵골(돌미륵) 삼밭골 남에 있는 골짜기. 이곳에 높이 70㎝쯤 되는 2개의 앉은 돌미륵이 있다.
삼밭골 가서 서쪽에 있는 마을. 삼밭이 있었다.
오정골(오장골) 가동 서남에 있는 마을.
주연 오정골 동남에 있는 마을. 옛날 동네 앞에 연당이 있었다 한다.

강동동

강동동(江東洞)은 행정동 명칭이며, 멀리 삼국시대부터 하나의 독립된 행정구역을 갖고 있었던 역사 깊은 고장이다. 신라 파사왕 때(80년 ~ 112년) 이곳에 현치(縣治)를 둔 율포현(栗浦縣)이 농소·방어진·감포까지의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경덕왕 16년(757년) 12월에 율포현이 동진현으로 개칭되어, 경주시 모화지방의 임관군 영현으로 있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동진현이 흥려부에 편입되면서 현치가 없어지고, 현종 2년(1011)에 유포진(柳浦津)이 되었다. 조선 태조 때 유포면이 되었고, 고종 24년(1887년)에 강동면으로 고치고 면소재지를 유포리에서 정자리로 옮겼으며, 동천강의 동쪽이 되므로 강동면이라 하였다. 1914년 4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산군 강동면(9개리로 관할)이 되었고, 1915년 2월 1일 경북 경주군 양남면 신대리 일부를 대안리에 편입하였다.
1917년 10월 1일 제령 제 1호(면제시행 - 1917년 6월 9일 공포)에 따라 면제(面制) 시행으로 면에 직원을 두고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1952년 4월 25일 초대 강동면의원 12명이 선출되어 면자치제를 실시하였다. 1956년 8월 8일 2대 면의원(11명) 및 초대면장, 1960년 12월 19일 3대 면의원과 12월26일 2대 면장을 선출하였다. 5·16직후인 1961년 9월 1일 읍·면자치제가 폐지되고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되면서 면은 단순히 군의 하부기관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설치로 울주군 강동면, 1991년 1월 1일 울주군 명칭변경으로 울산군 강동면,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울주구 강동면이 되었다.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가 설치됨에 따라 강동면을 강동동으로 개편하여, 신명·대안·산하·정자·무룡·신현·구류·당사·어물 등 9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강동해변
어물동에서 신명동까지 길이 13㎞, 폭 40m로 동해 남부해안에 위치해 청정해역과 주상절리, 흑몽돌 등 수려한 해안 자연경관을 지니고 있으며, 국도 31호선을 따라 경주·포항과 지리적으로 연계돼 신라문화권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종합관광지로 매년 이 지역에서 신년해맞이축제·정월대보름 달맞이 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또한 피서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신명동 (新明洞)

경상북도와 경계가 되므로 지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임내동과 공암동을 병합하여 신명리라 하였다. 울산광역시 교원연수원(옛 신명초교)이 있다.
신명동 지명유래
굼바우(구멍바우, 공암) 신명 북쪽에 있는 바위. 구멍이 뚫렸다.
수반(임내) 신명동에 있는 마을. 앞에 숲이 있었다.

대안동 (大安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산·신안과 경북 경주군 양남면의 신대동 일부를 병합하여 대안리라 하였다. 신라 제10대 내해왕 17년(212)에 골포(경남 창원시), 칠포(경남 함안군)와 고사포(경남 고성군)의 세 나라가 갈화성(울산 울주)을 침입하니, 임금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서 적을 크게 쳐부수어 편안히 지내게 되었으므로 대안동이라 하였는데, 이를 파군성의 역이라 한다.
대안동 지명유래
김씨 열녀각 대안동에 있는 열녀각. 제 망녀 정려각이라고도 한다. 김덕기의 아내 김씨가 홀시아버지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이 병들어 수개월이 되자 늘 하늘에 기원하기를 대신 죽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남편이 죽으니 뒤따라 자결하였다. 고종 41년(1904)에 정려하였다.
다음곡(다음골·다음밭골·다음리) 대안동에 있는 마을. 주막이 있어 시끄러웠다고 한다.
달기미산(달기미) 대안 동남에 있는 산. 옛날에 바닷물이 넘쳐 그 산봉우리가 닭 한마리 앉을 만큼 남고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한다.
삼동광산 대안동에 있던 금광
상대안(웃대안) 대안동의 위쪽 마을.
신안 어전마을 서남에 있는 절.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4년(635) 명랑조사가 창건 하였다. 문무왕 16년(678)에 만리성을 쌓을 때 승병 100여명이 이 절에서 무술을 닦았다 한다.(86쪽 참조)
신흥사 호계장이 있는 마을.
어전(재말리) 대안동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다.
우음곡(우잉이·우음) 대안동의 골짜기에 있는 마을.
중마을(대안중리·중말) 상대안과 신안 중간에 있는 마을.

산하동 (山下洞)

삼바우(삼암)가 있으므로 삼바우 또는 삼암, 변하여 산음, 산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경동의 일부와 화암을 병합하여 산하리라 하였다.
산하동 지명유래
갈밭미기(갈산) 산하 서부에 있는 마을. 갈밭이 있었다.
불못골 산음 서남에 있는 마을. 풀뭇간이 있었다.
산음 중묘 서쪽에 위치한 마을
삼성화암 광산 산하동에 있는 고령토 광산.
중묘(중미) 산하동에 있는 마을. 중앙에 묘가 있다.
화암 산하동에 있는 마을

정자동 (亭子洞)

220여년전에 마을 가운데 24그루의 포구나무 정자가 있어 정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전동과 달동 일부를 병합하여 정자리라 하였다. 강동동 소재지로서 강동파출소, 강동초등학교, 강동중학교, 강동우체국, 강동농협, 울산수협 강동지점, 활어직판장, 시장 등이 있다.
정자동 지명유래
낙끄테(용의머리) 북정자 동북에 있는 바위.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남정자 정자동 남쪽에 있는 마을.
북정자 정자동 북에 있는 마을. 정자성터가 있다.
분두골(분곡) 남정자 서남에 있는 마을. 분토가 났다.
버드내(유포, 유등포) 정자에 있는 마을. 버드나무가 많았다.
선창 북정자 앞에 있는 나루터.
옥녀봉 분두골 남에 있는 산. 옥녀산발형이라 한다.
유포석보 75쪽 참조.
죽전(죽림) 분두골 서남에 있는 마을. 옛날에는 대밭이었는데 오죽(烏竹)이 많이 났다.
장승배기 남정자 북쪽에 있는 마을. 장승이 박혀 있었다.
추보당 진사 김원문 이하 5대까지의 재실. 이규린의 기(記) 등이 있다.
축간(축항) 선창 남쪽에 있는 마을. 축항 시설이 되어 있다.

무룡동 (舞龍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주념동·달동 일부를 병합하여 무룡산 밑에 있었으므로 무룡리라 하였다. 현재 청소년체육활동장(옛 무룡분교)이 이곳에 소재하고 있다.
무룡동 지명유래
구산재 달골에 있는 동지중추부사 김득훈의 재실. 장석영의 기(記)가 있다.
달골(월곡·달동) 무룡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강동동, 농소1·2동과 경주시 양남면으로 가는 길이 사통오달로 나 있다.
명촌(맹촌·비석거리·참새미) 달골 밑에 있는 마을. 조재선의 영세불망비와 물이 찬 샘이 있다.
무룡산 울산의 진산(452.3m). 연암동, 화봉동, 무룡동 일대에 걸쳐 있다.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울산읍지」 등에는‘무리룡산(舞里龍山)’이라 기록되어 있고, 산자락 사람들은‘매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아랫주렴(하주렴) 주렴골의 아래쪽 마을.
주렴골(주렴·주념) 무룡동에 있는 마을.
큰골(대곡) 무룡동의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
탕건산 무룡·산하·정자동 경계에 있는 산. 탕건처럼 생겼다해서 이름 붙여졌다.(높이 295m)

신현동 (新峴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전동·장등동·구남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전과 장등의 뜻을 따서 신현리라 하였다.
신현동 지명유래
구남 마을의 산과 바위가 거북이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달현(달골재, 달현령, 작은 잘령재) 장등 서남에서 화봉으로 넘어가는 고개.
못안(지내) 신현동에 있는 마을. 못 있는 골짜기의 안쪽이 된다.
무제당터 못안 동쪽, 무룡산 중턱에 있는 기우제단 터. 무룡산이 영검하다하여 가뭄에 무제(기우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다.
불매골(부뭇골, 야곡) 장등만등이 서북에 있는 마을. 불맷간(대장간)이 있었다.
신전 신현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밭에 집을 지었다.
신전양지 신전 동남, 양지쪽에 있는 마을.
영구재 신현동에 있는 이득곤의 재실. 후손 이석정의 기(記)가 있다.
장등 신전에 있는 마을. 무룡산의 긴 등성이 밑이 된다.
장등만등이 장등에 있는 등성이
장명골(장명곡) 신현동에 있는 마을.

구유동 (舊柳洞)

버드개 또는 유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포·복성·판지·지동·저전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유포면 소재지였으므로 「옛날 유포」라 하여 구유리라 하였다. 여기서 담근 유장은 맛이 좋아 나라에 진상하기도 했다.
구유동 지명유래
미역바위(곽암) 유포에 있는 바위.(80쪽 참조).
지동 판지 서쪽에 있던 마을.
복성 판지 남쪽에 있는 마을
제전(저전, 딱바) 구유동에 있는 마을. 옛날에 닥밭이 있었다. 앞에 저전나루터(딱 바나루)가 있다.
판지(판기) 구유동 바닷가에 있는 마을. 해안 일대에 반석이 판자처럼 깔려 있다.
판지홈나무끝(큰껏, 홈들끝) 판지 동쪽에 있는 들. 홈통이 놓여 있었다.

당사동 (堂舍洞)

마을 입구에 당산제를 지내는 당집이 있었으므로 당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우가·어물·저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당사리라 하였다. 옛 동해초등학교가 있다.
당사동 지명유래
까칫골(작동, 깐추골) 당사에 있는 마을. 까치가 많았다.
거무섬 당사 북쪽에 있는 섬.
용동굴(용난터, 요왕미기, 굴방구) 당사에 있는 굴. 어물·금천·당사의 경계가 되는데, 거센 풍랑에 깎인 앙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길이 약 5m, 높이 2m쯤 된다. 옛날, 천국에서 내려온 아그락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해안의 큰 뱀이 그 남쪽 해안의 거북이보다 착하다고 여겨 옥황상제에게 뱀을 추천하여 뱀이 용이 돼 승천하는 날, 일진풍우가 몰아치고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위산 하나가 둘로 갈라졌다. 그러자 용은 무룡산 위에서 춤을 춘 후에 승천하였다.
우가(소집골) 당사 동남쪽에 있는 마을. 우가산 밑이 된다.
우가산 북구 당사동과 구유동 사이에 있는 173.5m의 산. 간봉망인 유포봉수대가 있었다.
유포봉수대(우가포 국수봉) 우가포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있었던 봉수대. 조선시대의 해안군사 통신 수단인데, 남으로 남목천(주전)봉수대, 북으로 경주부 하서지(하서 봉수대)에 응하였다.

어물동 (於勿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남동 일부 지역과 구암동을 병합하여 어물리라 하였다. 어물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금천, 황토전, 구암 등의 마을이 있다.
어물동 지명유래
가운데고개(중령) 가운데마을에서 연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구암 금천 동북에 있는 마을. 거북같은 바위가 있다고 한다.
강릉유씨 정려각 어물동에 있는 박영헌의 아내 강릉 유씨의 열녀각. 18세에 남편과 사별했는데 출가 한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 시부모 봉양에 효성이 지극하고, 지아비의 탈상이 가까워지자 조카를 양자로 맞아들여 놓고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조선 고종때 정려하였다.
고래논 물청청 골짜기에 있는 고래실논. 옛날 동구 주전동 해안에 살고 있던 한 어부가 조그마한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큰 고래 한 마리가 물기둥을 내뿜으면서 다가와 큰 입을 쩍 벌리더니, 그만 그 어부와 고깃배를 송두리째 삼키고 만 것이다. 어부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답답해서 견딜 수 가 없었다. 둘레를 살펴보니 고래의 뱃속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뱃장에 있던 칼을 잡고 고래의 배를 갈라 그 사이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 고래의 크기는 삼간 집채만 하였는데 이것을 팔아서 이 논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천 어물동에서 으뜸가는 마을. 다섯 손가락 모양의 산이 있는데, 그 앞산을 거문고판이라 하며, 그 아래로 냇물이 흐른다.
마애여래좌상 부처봉 동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삼존불상(높이 3.5m, 폭 1m). 가운데 불상은 상반신이고 양쪽의 불상은 전신 입상인데 1933년에 발견되었다. 불교 신도 김불불에게 부처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 비바람을 맞고 있으니 덮어다오. 나는 지금 동쪽 10리 안에 있다’하여 깨어보니 꿈이었고 찾아보니 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71쪽 참조)
모동 물청청 위쪽에 있는 골짜기.
물청청(물청진. 물칭칭, 수청진) 가운데고개 동남에 있는 마을. 물이 맑고 좋다.
방방골(방방곡·방방아골·방방웃골) 황토전 동남에 있는 마을. 방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봇골(보곡, 복곡) 금천 북에 있는 마을. 수원이 좋은 보가 있다.
부처봉 어물리에 있는 산. 부처(미륵삼존불상)가 있다. 부처를 봉안하여 1938년 김불불 신도가 석불암을 중창했다. 이 부처를 1997년 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 하였다.(71쪽 참조)
산두골[산두곡(山頭谷)] 가운데고개 서남에 작은분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
산맥(산막) 어물동에 있는 마을. 산막이 있었다.
성골(성곡) 구암 서남에 있는 마을. 방어진목장의 마성이 있었던 곳이다.
황토전(활토전) 방방골 서에 있는 마을. 흙빛이 누렇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무룡산의 선녀와 용'에 얽힌 옛이야기
옛날 이 산 꼭대기의 연못에 7마리의 숫용이 살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다른 용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어느날 선녀 7명이 이 연못에 내려와 목욕을 하게 되어 7선녀와 7용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마음씨 착한 한 선녀가 눈먼 용과 짝이 되어 즐겁게 놀았다. 목욕을 마친 선녀와 용들은 서로 정이 들어 함께 하늘로 오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마음씨 착한 선녀는 눈 먼 용이 하늘로 오를 수 없음을 알고 연못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런데 6선녀와 6용들이 하늘로 오르자마자 천둥이 치며 장대 같은 비가 퍼부었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6용과 6선녀들은 다시 그 연못으로 내려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한다. 눈 먼 용과 착한 선녀는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올라가, 실명된 용은 상제의 조화로 눈을 뜨고 착한 선녀와 배필이 되었다. 그 뒤 옥황상제의 노여움이 풀리어 6용의 부부들도 승천했다고 한다. 그런 뒤로 무룡산 꼭대기에는 못이 없어졌으며, 거기에 묘를 쓰면 울산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알아보기 반석(盤石) - 넓고 편편한 바위. 너럭바위 - 닥나무의 준말, 한지의 원료로 쓰인다.
'모동'에 얽힌 옛이야기
옛날 어떤 과부가 호동이라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여기서 살았다. 어느 날, 캔 약초를 팔러 나간 아들이 날이 어두워도 안 돌아왔다. 불안한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뛰어가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발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는 문둥이가 호동이를 타고 올라 앉아 입에 솜을 틀어막고 간지르며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고 있었다. 호동 어머니가 죽여 봐라고 하며 가슴을 풀어 헤치고 덤비니 그 기세에 꺾인 문둥이는 그만 칼을 던지고 꿇어 앉아 잘못 했다고 빌었다. 옛말에 사람을 간질러서 간이 부풀게 한 다음 배를 갈라 그것을 꺼내 먹으면 문둥병을 고칠 수가 있다고 했다. 정신이 돌아온 호동이와 어머니, 그들 모자가 함께 안도의 눈물을 흘리니,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문둥이는 수없이 절을 하며 잘못을 빌었다. 호동이는 어머니에게, ‘아저씨가 저 칼로 찔러 죽일 수 있었는데 살려줬고, 또 저렇게 빌고 있으니 마음씨 착한 아저씨라고 생각해요. 우리 이 골짜기에 함께 삽시다’하여 드디어 문둥이와 함께 모동골에 살게 되었는데, 거처만 따로 하는 한집 식구가 된 것이다. 어느날, 뇌성벽력이 치고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더니 짚단만한 잉어 한 마리가 마당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잉어를 잡아 끓여 먹고 난 문둥이는 사흘 만에 전신에서 딱지가 줄줄 떨어지며 몸이 홀가분하고 기분이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날부터 세 사람은 한 식구가 되어 한집에서 살았다. 하루는 이 아저씨가 약초를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어두운데 이상한 빛이 번쩍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금덩이었다. 세 사람은 이 금덩이를 팔아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얘기가 전해진다.

효문동

효문동(孝門洞)은 조선시대 통천지효자(通天之孝子) 송도(宋滔) 선생의 출생지이다. 효문동은 숙종 34년(1708년) 하부내면지역으로, 정조 4년(1780년)에 하부내면이 내상면으로 개칭되었다. 고종 1년(1864년)에는 내상면이 부남면과 내상면으로 개편되면서 부남면에 속하였으며, 동왕 31년(1894년) 부남면이 하부면으로 개칭되면서 진장·명촌 지역은 중리·평촌·명촌·대도·독도·신도·진장동으로, 효문지역은 효문·산성·율동으로, 연암지역은 상방·연암동으로 불리웠다.
1911년에는 진장·평촌·명촌·대도·독도동과 효문·산성·율동·상방·연암동으로, 1914년 4월 1일 지방제도개편시 하부면과 내상면의 통합으로 하상면(진장·명촌·효문·연암·양정·반구·약사·동·서·장현·남외리 관할) 진장·명촌·효문·연암리로 개편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에 편입되어 병영출장소 관할(진장·명촌·효문·연암동)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진장동과 명촌동을 합하여 진장동을, 효문동과 연암동을 합하여 효문동을 설치하였다. 1976년 4월 20일로 병영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 1985년 7월 15일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중구 진장·효문동이 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에 따라 북구(자치구) 진장·효문동이 되었으나, 1998년 10월 1일 울산광역시북구 조례 제124호(1998년 10월 1일 공포)로 진장동을 효문동으로 통·폐합하여 현재의 효문동(4개 법정동 관할 - 진장·명촌·효문·연암동)이 되었다.

효문동 (孝門洞)

송도의 효자 정문이 있었으므로 효문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성동과 율동, 연암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효문리라 해서 하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효정고등학교, 효문초등학교가 있으며, 효문공단이 소재하고 있다.
효문동 지명유래
대밭골(죽전곡) 효문 북쪽에 있는 마을. 대밭이 많았다.
밤나무골(율동) 효문 동남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
소미기 호암 동남에 있는 마을. 옛날에 목장이 있었다.
산 성(산성지) 대밭골 북쪽에 있는 마을. 효문산성 터가 있다.
송교자문 터 효자송도의 정문터. 그는 연안 송씨의 후예로서 학덕이 높았는데 ‘울산부읍지’에 그 효행 사실이 전한다.
충효사 율동에 있던 사당. 헌종 10년(1844)에 세워서 부장 박춘영과 창의사 박춘무를 모셨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전공을 세웠다.
효문만당 효문동의 원마을. 만당(등성이) 밑이 된다.

연암동 (蓮岩洞)

백련암이 있으므로 연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방동을 병합하여 연암리라 해서 하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우리 북구청이 소재하고 있으며, 강북교육청, 무룡고등학교, 연암중학교, 연암초등학교, 울산시티병원 등이 있다.
연암동 지명유래
가운데고개(가운데 고개, 왕거령) 옥천암 서에 있는 고개. 옛날 하상면과 강동면 가운데가 되었다. 신라시대 임금님이 이 재를 넘어갔다 하여 와어령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두부곡(두부골) 상방 서북에 있는 마을.
무룡산 연암동에 있는 산(54쪽 참조)
상방(상방동) 연암동의 위쪽에 있는 마을. 방은 마을을 뜻한다.
상연암(웃연암) 연암동 위쪽에 있는 큰 마을.
옥천암(오봉사) 연암동에 있는 절. 무룡산 남쪽 오봉산 기슭이 되는데, 신라 때 세워 용왕에게 나라의 수호를 빌었다한다.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다.
원연암(아래 연암. 하연암) 연암동의 원마을. 연암동 아래쪽이 된다.

진장동 (珍庄洞)

진장동(珍庄洞)은 원래 좌병영의 진장(陣場)이었다고도 한다. 고종 31년 (1894)에는 진장(陣長)이라 하다가 1914년에 진장(珍庄)이라 고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산주동과 평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 진장은 좌병영의 습진터(習陣場)였던 곳이라 하며, 이름의 유래는 「갈아먹지 아니하고 버려두어서 거칠게 된 밭」이란 뜻의 진전(陣田)이 변해서 진장이 되었다 (동천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그러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진장중학교, 울산경제진흥원, 경동도시가스, 신선도원몰(메가마트), 농수산물유통센터 등이 있다.
진장동 지명유래
관상들 「관상바대·광상·과상」 진장 동쪽에 있는 넓은 들.
장신배기 「장승배기」 진장 북쪽에 있는 마을. 장승이 박혀 있었다 한다.

명촌동 (明村洞)

처음 이름은 평야에 있다 하여 평촌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명촌으로 바꾸어 쓰였다. 현재는 진장·명촌 토지구획정리지역으로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있으며, 명촌초등학교가 있다.
명촌동 지명유래
딴섬 큰섬 서쪽에 있던 마을. 외딴 섬에 있었다.
신평 명촌 북쪽에 있던 마을. 앞에 새로 개간한 들이 있었다.
작은섬 딴섬 옆에 있던 마을. 작은 섬이었다.
큰섬 「대도, 섬」평 명촌 동남에 있던 마을. 옛날 큰 섬이었으므로 대도 또는 섬이라고도 하였다.
송도(宋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평소 학행에 힘써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부모를 섬기는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눈이 멀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침소과(小科, 생원시)에 합격하여 돌아와 부모님을 뵙자 문득 눈이 뜨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병이 깊어진 어머니가 생선회를 먹고 싶어했으나 가난하여 사드릴 수 가 없었다. 물가에 가서 얼음을 깨뜨리고 눈물을 흘리니 붕어가 튀어나와 이를 어머니께 바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제사를 맞이했으나 제사음식을 마련하지 못해 안타까워 할 때 마침 산꿩이 집안으로 날아들어 이를 제수에 유용하게 썼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초막에서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불가(佛家)에서의 예식은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가 중국에 조공을 갔을 때였다. 중국의 조정에서 우리나라의 인물될 만한 사람을 묻자 이에 대답하기를, “송도와 박효랑(朴孝浪)으로서 바로 하늘이 감복한 효자이다”라고 하였다. 명(明)의 신종(神宗)황제가 패문(牌文)을 내리며 이르기를, “중원은 대국으로 왕상(王祥) 같은 효자가 있으며, 조선은 비록 소국이나 송도같은 효자가 있으니 이에 홍문(紅門)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어 명의 황제는 직접 글을 지어 효도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모든 행동의 근원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지극한 효성은 송씨(宋氏) 문중에 아직도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정려(旌閭)를 짓고 기념비를 세웠다.
'백련암'과 '군자정'
백련암과 군자정에 대하여는 시(詩)와 글(文)이 여럿 전하고 있다. 고려 충숙왕 9년(1322), 이곳 무룡산 서쪽 기슭 낮은 구릉 위에 사람처럼 서 있는 바위 하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옥정이란 우물이 있었다. 하루는 이 바위 위에 흰 연꽃 무늬가 나타나면서 주위에 서기가 비치었으므로 이 바위를 ‘백련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중종 27년(1532) 8월에는 옥정에 연꽃이 피어 겨울이 다가와도 시들지 않고 그대로 넘기니, 이 소문이 전국에 널리 퍼져 시인 묵객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보다 얼마 전인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아버지 준손과 함께 지방에 유배되었던 김대유가 중종 원년(1506)에 풀려나서 옥정 옆에 군자정을 세워 ‘삼족당’ 이란 현판을 붙여 스스로 당호로 삼고 ‘군자정기’를 써서 걸었다. 이 기가 명문이라 군자정은 더욱 유명해져 문학인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느 욕심꾸러기 벼락부자가 과객들의 칭송이 번거롭고 귀찮을 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드는 것은 백련암이 있는 탓이라 하여 쇠망치로 이 바위를 산산이 깨뜨리고 옥정에 뿌리를 박은 백련도 뽑아 버렸다. 그 뒤 이 소문이 퍼지자 탑승객의 발자취가 끊겼으며 그의 가세도 날로 내려앉아 결국 망하고 말았다 한다. 이 전설은 이 지방 어느 분의 이야기인데 오늘날은 백련암, 옥정, 연꽃 그 어느 것도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백련암과 군자정에 관한 전설, 지명 및 명사들의 시와 글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송정동

송정동(松亭洞)은 원래 농소면 지역으로 신라시대 율포현(파사왕 때 / 80년 ~ 112년) 지역이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율포현은 동진현으로 개칭되었다. 그후 고려 태조 23년(940년) 흥려부에 통합되었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 울산군 농소면으로, 영조 5년(1729년)에 송정방·사청리라 불리다가, 동왕 41년(1765년)에는 송정·지당리와 사청리로 불리웠다. 순조 20년(1820년)에 농소면이 어련천(현재의 동천)을 경계로 농소·수서면으로 분면되면서 오늘날 송정동은 농소면에 속하게 되었다. 고종 4년(1867년)에 송정·지당·덕종리, 송내·화산·화동리로 되었다가, 동왕 31년(1894년) 농소면이 농동면으로 개칭되면서 송정·지당·덕동과 송내·화산·화동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농동면과 농서면을 통합하여 농소면으로 개편함에 따라 농소면 화봉·송정리가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에 편입되어 병영출장소 관할(화봉·송정리)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화봉동과 송정동을 합하여 송정동을 설치하였고, 1976년 4월 20일 병영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중구 송정동이 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 송정동이 되어 화봉·송정동 2개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송정동 (松亭洞)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리·지당리·덕동리 3개 마을에 원지동과 화산동의 일부를 합치면서 큰 소나무들이 많이 우거져 있고 좋은 정자가 있었다 해서 송정이라 하여 농소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현재는 울산의 관문인 울산공항이 위치하고, 일제치하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던 박상진의사의 생가가 있으며, 송정지구의 대단위 아파트가 조성 중이다.
송정동 지명유래
곡리 「골송정·송정골짜기·골말」 새각단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날개뱅이 「날개빙·익봉」 송정동에 있는 산.
달냇골 「달래골·월천곡」 송정과 화봉 경계에 있는 골짜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달골재 「달현·달현령」 송정에서 강동동 달골로 넘어가는 고개. 재가 매우 비탈지고 굽이가 많다.
대리 「봉산정」 달냇골 북쪽에 있는 큰 마을. 박창우진사의 정자 봉산정이 있다.
덕걸 「덕걸이·덕동」 송정동 위쪽에 있는 마을.
비석거리 송정동에 있는 마을. 옛 수령들의 선정비들이 서 있다.
새각단 송정동에 새로 이룩된 마을.
지당 「지당골」 큰각단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 마을안에 지당(연못)이 있었다.
큰각단 송정동에서 가장 큰 마을.

화봉동 (華峰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내동·화산동·지당동과 장현동·학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화봉리라 해서 농소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에 편입되어 동이 되었다. 화봉동은 산봉우리가 겹겹이 뻗어 내린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컴퓨터과학고등학교, 화봉중학교, 송정초등학교 등이 있다.
화봉동 지명유래
괴천정 화산 동쪽에 있는 정자. 생원 박창우가 세웠다.
동화산 북구 화봉동에 있는 237m의 무룡산 줄기이다.
사청(송내) 화봉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앞에 솔밭과 큰 못이 있었다.
서답통(서당골) 대밭골 어귀에 있는 소(沼). 아낙네들의 빨래터이다.
선암산 화봉동에 있는 산. 신선바위가 있다.
신선바위 선암산에 있는 바위. 옛날 신선들이 그 위에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 한다.
영모암 화봉동에 있는 부정 이세형의 재실
영치 화봉동에 있던 마을.
좌돗돌(화도번덕) 화동 옆에 있는 작은 들판. 옛날 병영의 건물 일부가 있었다.
화동약물탕(화산찬) 화동에 있는 약물터. 채독병에 특효가 있었다.

양정동

양정동(楊亭洞)은 조선 숙종 34년(1708년) 하부내면 지역이었으며, 영조 41년(1765년)에 오정리와 양정리라 불리웠다. 정조 4년(1780년)에 하부내면이 내상면으로 개칭되고, 고종 1년(1864년)에는 내상면 분면으로 부남면이 되었다. 동왕 31년(1894년)에 부남면이 하부면으로 개칭되면서 양정동·치규리·치진리로 불리웠다. 1911년에는 양정·양·치진동이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는 하상면 양정리로 개편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에 편입되어 병영출장소 관할(양정리)이 되고, 1972년 10월 1일 울산시 31개 행정동으로 개편함에 따라 염포동(현재의 양정·염포동)이 설치되고, 1976년 4월 20일 병영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79년 5월 1일 시 조례 제625호(1979년 5월 1일 공포)로 염포동을 염포1동(현재의 양정동)과 염포2동(현재의 염포동)으로 분동하였다가, 1983년 5월 1일 시 조례 제899호(1983년 5월 1일 공포)로 염포1동을 양정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중구 양정동, 1997년 7월 15일 법률 제5234호(1996년 12월 31일 공포)에 따른 울산광역시 승격으로 북구(자치구) 양정동이 되었다. 양정동은 옛날에 버드나무가 많고 만풍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정동주민센터, 효정중학교, 양정초등학교, 양정생활체육공원,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등이 있다.
양정동 지명유래
땅땅멀리(장당벌리) 양정동 중앙에 있는 마을. 임진왜란 전사자들의 수많은 무덤이 있었으나 지금은 과수원으로 변해가고 있다.
만풍정 양정동에 있던 정자. 형조참판 유광선의 후손이 세웠다.
율동(밤나무골) 양정동 북쪽에 있는 마을. 밤나무가 많았다 한다.
장씨정려각 조선 정조 때 유진옥의 아내 장씨의 정려각.
제호정 양정동에 있던 정자. 판관 유백춘이 세웠다.
청양정 양정동에 있던 정자. 황봉하가 세웠다.
치전 양정동과 신정동 중간에 있던 태화강 어귀의 마을. 옛날에 꿩이 많았다 한다.
학호서원 터 양정 북쪽에 있던 서원터. 울산도호부사를 지냈던 청강이 제신을 모셨는데 대원군이 철폐하였다.
흰산 땅땅멀리 뒤에 있는 산. 흰 흙이 난다.

염포동

염포동(鹽浦洞)은 조선시대 3포 개항지(세종 8년, 1426년)의 하나로, 정조 4년(1780년)에는 동면 염포리였다. 고종 31년(1894년)에 염포동·신전동이라 불리웠다. 1911년 염포동과 심청동이 되었고, 1914년 4월 1일 염포리로 통합되었으며, 1931년에는 방어진면 염포리로, 1936년 7월 1일에는 방어진읍 염포리가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에 편입되어 방어진출장소 관할(염포리)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 31개 행정동으로 개편함에 따라 염포동과 양정동을 합쳐 병영출장소 관할의 염포동을 설치하였다. 1979년 5월 1일 시 조례 제625호(1979년 5월 1일 공포)로 염포동을 염포1동(현재의 양정동)과 염포2동(현재의 염포동)으로 분동하였고, 1983년 5월 1일 시 조례 제899호(1983년 5월 1일 공포)로 염포2동을 염포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중구 염포동이 되고,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설치에 따라 동구(자치구) 염포동이 되었다가, 1998년 3월 1일 대통령령 제15652호(1998년 2월 24일 공포)로 북구에 편입되었다. 염포동은 옛날부터 염전이 많아 소금이 나는 갯가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구 방어진과 중·남구로 이어지는 염포로와 아산로가 동서로 관통하며, 염포초등학교와 현대모비스·현대하이스코 등의 기업체가 있다.
염포동 지명유래
단고개 염포에서 남목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목에 돌맹이를 모아 단을 쌓아 놓았는데 누구든지 돌 하나씩을 주워서 여기 던져야 그날 길을 가는데 도둑을 만나지 않고 발병도 안나며, 무서운 짐승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을 가다가 단이 보이면 으레 돌맹이 하나를 주워서 그 위에 던졌다. 그리하여 돌단이 있는 부근에는 돌이 없어져서 깨끗한 길이 되었다. 돌단위에 돌을 던져서 맨 꼭대기에 얹히면 소원을 성취하며 노처녀·노총각은 시집·장가갈 운이 트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문골 염포동에 있는 마을. 조선때 마성의 출입문이 있었다.
성내(성안) 중리 서남 해안에 있던 마을. 조선 숙종때 목장을 두어 마성을 쌓았는데 그 안쪽이 된다.
신전(새장터) 염포동 서북 장터에 새로 이룩된 마을. 세종 때 삼포의 하나인 염포의 장터가 있었다.
약수암 지개골 약수탕 옆에 있는 절. 약물탕으로 인하여 세워졌다.
염포산 북구 염포동과 동구 전하동 사이에 있는 206m의 산이다.
중리 신전 남쪽에 있는 마을. 염포동의 중앙이다. 염포영성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아직도 성터가 남아 있다.
지개골 약수터 성내 동쪽 산에 있는 약물탕. 병에 효험이 있다하여 여름에 물맞이꾼이 많이 모여 든다.
푸지네다리 신전과 중리 중간 지점에 있던 다리. 옛날 푸지내라는 노파가 염세 자살한 곳으로서 그 후 밤중만 되면 푸지네 도깨비가 나타나 행인을 놀라게 하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대구머리(대구두) 애전 안쪽 바닷가에 있던 마을. 마을에 튀어 나온 산 모양이 대구 머리와 비슷하다해서 이름 붙여졌다. 지금 애전과 대구머리는 철거되어 현대미포조선소와 현대자동차의 전용부두로 변하였다.(현재는 동구 관할임)
애전(쑥밭) 성내 동남에 있던 마을. 옛날에 약쑥이 무성하였다.(현재는 동구 관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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