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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관문성

자연석을 쌓아 올려 위쪽으로 폭이 좁아지는 관문성 모습 큰나무 아래에 관문성 안내 표지판과 거리의 모습 관문성 안내 표지판과 풍경 모습 관문성 주위의 풍경 모습

현황

관문성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국가지정유산 사적(1963.1.21.지정)
소 재 지 북구 달천동, 중산동, 천곡동 및 울주군 범서면, 경북 경주시 외동읍 일원
축성시기 신라 성덕왕 21(722년)
지정면적 991,774㎡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탐방로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관문성은 울산광역시 북구, 울주군 및 경주시 외동읍 일대에 걸쳐, 왜적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침입해 올 것에 대비하여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돌로 쌓은 성이다.
  • 『삼국유사』에 의하면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길이 40~50cm로 다듬은 돌을 5~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으며, 위로 쌓아 올리면서 폭을 좁혀가는 물림쌓기 방법을 사용하였다.
  • 관문성은 그 규모가 12km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현재 울산~경주 간 국도변 일부에 성벽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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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메아리학교에서 경주방면으로 350m 지점 위치(도보 5분 소요)

울산 어물동 마애약사여래삼존상

당당한 체구와 띠 매듭의 표현 등은 뛰어난 수법으로 만들어진 어물동마애여래좌상의 모습 측면에서 바라본 어물동마애여래좌상의 모습 멀리서 바라본 어물동마애여래좌상의 모습

현황

어물동마애여래좌상 현황- 지정현황, 소재지, 제작연대, 보호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유형문화유산(1997.10.9.지정)
소 재 지 어물동 산121번지 일원
제작연대 통일신라시대
보호구역 5필지, 4,508㎡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주차장, 화장실

연혁

  • 울산 어물동 마애약사여래삼존상은 ‘방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자연 암벽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불상이다.
  •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좌우 협시로 둔 통일신라시대의 약사여래삼존상(藥師如來三尊像)이다.
  • 중앙의 본존불은 결가부좌로 앉은 모습이며, 마모가 심하지만 도톰한 볼과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보이고 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좌우 협시보살상은 입상(立像)으로, 머리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다.
  • 울산 어물동 마애약사여래삼존상은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약사삼존상임과 동시에 미술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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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감포강동동방면 31번 국도. 구남교차로에서 예비군훈련장 방향. 훈련장에서 1.4Km지점 위치(9Km, 17분소요)

박상진의사 생가

멀리서 바라본 방상진의사 생가의 모습 옆에서 본 박상진의사 생가 모습1 옆에서 본 박상진의사 생가 모습2 그늘아래 박상진의사 생가의 모습

현황

박상진의사 생가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 문화유산자료(1997.10.9.지정)
소 재 지 박상진5로 10(송정동)
부대시설 전시관, 역사공원, 국가유산 안내판

연혁

  • 이 집은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의사가 살았던 집이다.
  • 박상진의사는 1902년 허위(許蔿)선생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 되었으나 사퇴했다.
  • 그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섰다.
  • 박상진의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형집행으로 38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되었다.
  • 인대지주였던 박상진의사는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은 몰락하였고, 이 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2002년 울산시가 매입하여 2007년 복원 정비사업을 완료 하였다.
  • 이 집은 사랑채, 안채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관람시간

  • 수요일 ~ 일요일 : 09:30 ~ 17:30
  • 휴관일 : 월ㆍ화요일, 설ㆍ추석명절, 법정공휴일(3ㆍ1절, 8ㆍ15광복절 개방)

관람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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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송정저수지방면, 지당3길에서 우회전 450m앞 지점 위치(3Km, 8분소요)

신흥사 구 대웅전

정면에서 바라본 신흥사 구 대웅전의 모습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 모양의 팔각지붕인 신흥사 구 대웅전의 모습 신흥사 구 대웅전 내부 모습 신흥사 구 대웅전 표지판 사진

현황

신흥사 구 대웅전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제작연대, 보호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 문화유산자료(1998.10.19.지정)
소 재 지 대안4길 280(대안동)
축성시기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
보호구역 3필지 5,197㎡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이 건물은 본래 건흥사의 대웅전으로 635년(신라 선덕여왕 4년)에 명랑조사가 처음 건립했다고 전한다.
  • 절의 기록에 의하면, 678년 (문무왕 16년)에 승병 100여 명이 이 절에 머물면서 무술을 닦았다고 한다.
  • 이 절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과 관련이 깊다. 건흥사는 울산지역에서 승군 동원 기록이 있는 유일한 사찰로 울산지역 승병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 울산이 왜군에게 함락 되자 의병들은 기박산성에 진을 쳤다.
  • 이 절의 스님 지운은 승병 100여명을 이끌고 적극 참여했으며, 절의 양식 300여 석을 군량미로 내기도 했다고 한다.
  • 정유재란 때에 이 절이 불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병마절도사 이급이 1646년(인조 24년)에 절을 다시 세워 신흥사라고 했다.
  • 이 건물은 1998년 새로이 대웅전을 지으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집이다.
  • 조선후기 건축의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내부 천정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반자는 높은 예술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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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향 7번 국도. 천곡사거리에서 우회전 매곡로 진입. 마우나오션리조트방면, 기령고개앞에서 우회전 1.8km지점 위치(14km, 29분 소요)

중산동 고분군

위에서 올려다본 중산동 고분군 모습 중산동 고분군의 모습

현황

중산동 고분군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1997.10.9.지정)
소 재 지 중산동 616-1번지 일원, 694번지 일원, 대암훼미리아파트 주차장 내
축성시기 삼한시대 ∼ 신라시대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삼한 ·삼국시대에 형성된 대규모 고분군으로 현재 3군데 지정되어 있다.
  • 1991년과 1993년의 발굴조사 결과 돌덧널무덤, 덧널무덤, 돌무지덧널무덤, 구동식돌방무덤, 굴식돌방무덤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여러 종류의 토기, 둥근머리큰칼 등의 무기, 철판갑옷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장류가 다량 수습되었다.
  • 1,200여 점의 토기, 둥근머리큰칼 6점을 비롯한 200여 점의 철기, 금제 및 금동제 장식 3점이 수습되었다.
  • 2차 발굴에서 다시 101기의 무덤과 청동기시대 움집터 1기가 조사되었고, 960점의 토기와 다량의 철기가 수습되었다.
  • 중산동 고분유적과 유물은 삼한 ·삼국시대(신라) 묘제 및 토기의 변천과정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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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현대글로리아아파트 방면. 아파트앞에서 좌회전 30m지점 위치(9Km, 15분소요)

우가산유포봉수대

큰나무 아래에 있는 우가산유포봉수대 안내 표지판의 모습 자연석으로 쌓은 둥근 모양의 아궁이와 주위의 방호벽, 봉수군 막사터가 잘 남아 있는 우가산유포봉수대의 모습 멀리서 바라본 우가산유포봉수대의 모습

현황

우가산유포봉수대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제작연대, 보호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1998.10.19.지정)
소 재 지 당사동 230-3번지 일원
축성시기 조선시대
보호구역 6필지 8,262㎡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봉수대는 사방이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위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인근 봉수대와 서로 연락하여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과 해당 진영에 알리던, 옛날 군사 통신 수단의 하나이다.
  •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제도인 듯하나, 그 체제가 정비된 것은 조선 세종 때였다.
  • 오장과 봉군이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평상시에는 한 홰, 적이 나타나면 두 홰, 적이 국경에 접하면 세 홰, 적이 국경을 넘어오면 네 홰, 적과 접전하면 다섯 홰의 봉수를 울렸다고 하는데, 1894년(고종 31년)에 전보통신이 보급되면서 폐지되었다.
  • 이 우가산 유포 봉수대는 동해안에 위치하는 연변봉수 가운데 하나로 남목천(현재의 주전)에서 봉수를 받아 경주 하서지로 전했다.
  • 자연석으로 쌓은 둥근 모양의 아궁이와 주위의 방호벽, 봉수군 막사터가 잘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 연변 봉수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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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감포강동동방면 31번 국도. 예비군훈련장 방면. 훈련장에서 4.8Km 지점 강동축구장 인근 위치(13Km, 24분소요)

유포석보

파란하늘과 유포석보의 모습 유포석보의 정면의 모습 유포석보의 정면의 모습

현황

유포석보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1998.10.19.지정)
소 재 지 정자동 625번지 일원
축성시기 조선시대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임시주차장

연혁

  • 이 성은 조선조 전기에 설치된 석보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문종 즉위년(1450년)에 처음 목책 설치를 시작하여 세조 원년(1455년)에 완료하였다.
  • 그러나 단종 즉위년(1452년)에 다시 석축으로 개축하는 것이 논의 되기 시작하여 세조 5년(1459년)에 완료하였다고 한다.
  • 이곳에는 병영과 울산, 경주 양진의 병사가 교대로 주둔하면서 수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현재 남아있는 체성은 구릉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성내로 삼고 그 주위를 협축한 포곡성 형태이며, 둘레 880m, 현존높이 1.2m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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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감포강동동방면 31번 국도. 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 250m지점 위치(10Km, 17분소요)

상안동 지석묘

햇빛 아래의 상안동 지석묘 가까이서 바라본 상안동 지석묘

현황

상안동 지석묘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0.11.9.지정)
소 재 지 상안동 223-1번지
축성시기 청동기시대
수    량 1기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이라 하여 구분한다. 울산지역에서는 주로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나타난다.
  • 상안동 지석묘는 바둑판식 1기로서 상안동 신답마을의 경작지에 있다.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땅 위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데, 크기는 210㎝, 너비 170㎝, 두께 100㎝ 정도이며, 덮개돌 위에는 작은 돌로 문질러서 둥글게 판 알 모양의 성혈이 10여개가 있다.
  • 이 성혈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거나 태양을 상징한다고 본다.
  • 덮개돌 아래의 양쪽에는 받침돌이 보이는데 내부 구조는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이 상안동 지석묘는 북구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청동기시대 상안동 일대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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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쌍용아진그린타운 방면 (5Km, 11분소요)

창평동 지석묘

햇빛 아래의 상안동 지석묘 가까이서 바라본 상안동 지석묘

현황

창평동 지석묘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제작연대, 보호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0.11.9.지정)
소 재 지 창평동 178번지, 145-3번지
축성시기 청동기시대
수    량 2기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연혁

  •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지석묘 집중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우리나라의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것을 탁자식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 또는 무지석식이라 하여 구분한다.
  • 울산지역에서는 주로 개석식과 바둑판식이 나타난다.
  • 창평동 지석묘군은 창평동 난골마을 구릉에 1기, 경작지의 논두렁에 1기가 있는데, 300m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 덮개돌은 화강암으로 땅 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데 논두렁에 있는 것은 크기가 길이 210㎝ 너비 210㎝ 두께 90㎝ 정도이며 받침돌은 보이지 않고, 구릉에 있는 것은 길이 180㎝, 너비 150㎝, 두께 90㎝ 정도이고 받침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덮개돌 아래에 깔려 있다.
  • 내부구조는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 이 창평동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창평동 일대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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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원지삼거리에서 우측방향 (4.75Km, 8분소요)

곽암

곽암(미역바위)과 그 위에 날고 있는 갈매기의 모습 바다한 가운데의 곽암(미역바위) 모습 곽암(미역바위) 안내 표지판의 모습

현황

곽암(미역바위)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1.12.20.지정)
소 재 지 구유동 판지마을 해수면하
지정구역 503㎡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연혁

  • 곽암은 미역바위라는 뜻이다. 이곳 판지마을 바다 속에 있는 자연암인데 "양반돌", "박윤웅돌" 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 1937년 간행된 "흥려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박윤웅은 고려 태조(918~943)가 나라를 세울 때 공을 세워 흥려백에 봉해졌다.
  • "흥려"라는 말은 고려를 흥성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 동진(현의 농소 ·강동)을 채지로 하사 받았다.
  • 강동의 미역바위 하나에서 생산되는 미역을 바닷가 사람들이 박윤웅의 후손 집안에 제공해 왔다.
  • 바위에는 '允雄'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는데, 이것은 박윤웅의 위대한 공훈과 영원토록 썩지 않을 뜻을 기려서 어사 박문수가 새긴 것이다.
  • 또한 "고려통합삼한록"에는 박윤웅이 2등 공신에 봉해졌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시호는 장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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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감포강동동방면 31번 도로. 정자삼거리에서 우회전 880m지점 판지구이단지 맞은편 위치(11Km, 19분소요)

달천철장

위에서 바라본 달천철장의 모습 나무가 우거진 달천철장의 풍경

현황

달천철장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3.4.24.지정)
소 재 지 달천동 1-7번지 일원
부대시설 달천철장 관리시설(전시실, 교육장), 국가유산 안내판, 산책로 주차장

연혁

  • 철장이란 철의 원료인 토철 또는 철광석을 캐던 곳을 말한다. 달천동 및 상안동 일대에 분포하는 이 유적은 원래 이름인 달내에서 유래하였으며, 그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중국문헌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에는 "한·예 ·왜 모두가 여기서 철을 가져가며, 모든 시장에서 철을 사용하며 매매하는 것이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기사가 있다.
  • 그래서 철이 당시의 경제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우리 나라 문헌에 달천철장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시대 세종조부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1452년 달천에서 생산된 철 12,500근이 수납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달천의 철은 경주 황성동의 제철유적에서 출토된 철과 함께 비소성분이 확인되어 역사적 중요성을 더한다.
  • 철을 제련하는 곳을 쇠부리(쇠불이)터라 불렀는데, 달천 토철을 원료로 하는 쇠부리(쇠불이)터는 가까운 경주 외동읍 녹동리(덧거리)에서부터 멀리는 청도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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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으로 7번 국도. 천곡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달천아이파크 맞은편(8Km, 17분소요)

중산동 취락유적

드넓은 중산동 취락유적 모습 위에서 바라본 취락유적 모습

현황

중산동 취락유적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기념물 (2003.4.24지정)
소재지 중산동 656-1번지 일원
축성시기 삼한∼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취락유적

연혁

  • 이 유적은 옛 사람들의 집단거주이였던 곳으로 중산리 이화마을과 갓안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에 위치한다. 태화강 북쪽 지역을 대표하는 삼한 후기 ~ 삼국 후기시대 취락유적이다.
  • 2002년 발굴기관과 시굴조사에서 주거지, 작업장,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어 당시 취락의 구성, 범위, 배치 및 주변 지역과의 교류, 변천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사로국에서 신라로 성장해 가는 신라 초기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 인접한 중산동 고분군(기념물)을 축조한 주인공들이 바로 이 취락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은 살아있던 사람들이 생활공간과 죽은자들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하였다.
  • 또한 그들이 사용한 생산도구 중 철기구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생산지였던 달천철장(기념물)의 철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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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 7번 국도. 화정마을입구에서 우회전하여 월성유치원방면(9Km, 14분소요)

강동화암 주상절리

가로 방향으로 기둥이 뻗은 강동화암 주상절리의 모습 세로 방향으로 기둥이 뻗은 강동화암 주상절리의 모습 해돋이 전경과 강동화암 주상절리의 모습 파도 치는 강동화암 주상절리의 모습

현황

강동화암 주상절리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축성시기, 보호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3.4.24.지정)
소재지 산하동 952-1번지 일원
축성시기 신생대 제3기
보호구역 1필지 7,681.6㎡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도로표지판, 화장실

연혁

  • 화암 주상절리는 북구 화암동 화암마을 화암(꽃바위) 해변 일대에 분포하는 유적으로 신생대 제3기 중신세(약2,000만년전)에 분출한 현무암 용암이 난류를 일으키면서 냉각할 동안 유동방향이나 등온면에 수직되는 방향으로 군집주상체를 형성시켜 성인적으로 높은 학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유적은 우리나라 특히 동해안에 나타나는 주상절리 중 용암 주상절리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될 뿐 아니라 주상체들은 좁은 구역내에서 그들은 거의 수평(대표적 방향) 내지 거의 수직되게 가지런한 목재더미처럼 방향을 휘어가며 배열되고 있고 그들의 횡단면은 꽃무늬를 보여주고 있어 화암(花岩)이라는 지명이 시사해 주듯이 높은 경관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성인과 지질시대의 학술적 관점과 경관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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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감포강동동방면 31번 국도. 정자삼거리에서 좌회전 2.4Km지점 위치(12Km, 23분소요)

대안동 쇠부리터

숯을 구웠던 흔적과 쇠부리작업 당시 생긴 쇠똥 등이 남아 있는 대안동 쇠부리터 모습1 숯을 구웠던 흔적과 쇠부리작업 당시 생긴 쇠똥 등이 남아 있는 대안동 쇠부리터 모습2

현황

대안동 쇠부리터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규모(수량), 지정구역으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6.1.26.지정)
소 재 지 대안동 산177번지 일원
규모(수량) 1기(잔존 가마 높이 100cm, 지름 200cm)

연혁 및 지정사유

  • 삼한시대 이래 영남지역 최대 철생산지였던 달천철장의 토철을 이용하여 쇠를 생산하던 쇠부리터는 권병탁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울산, 경주, 밀양, 청도 일대에 약 120여기 이상 존재하였고, 그 중 상당수가 울산, 경주에 분포하였다.
  • 대안동 쇠부리터는 그 중 1기였던 것으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옆에 작은 천(川)이 흐르고 있는데, 이것은 쇠부리작업에 필요한 연료(숯) 및 물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이곳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 쇠부리 작업에 사용하던 석축, 제련로 일부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주변에 관련 유적 및 쇠똥(슬래그)이 산재하고 있어 조선시대 쇠부리터의 다양한 양상과 자료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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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으로 7번 국도. 매곡산업단지 지나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 어전마을 방면으로 5.1Km(35분소요)

매곡동 생활유적

위에서 바라본 매곡동 생활유적의 모습

현황

매곡동 생활유적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지정구역, 부대시설로 구성
지정현황 시지정 기념물(2007.11.22.지정)
소재지 매곡동 351-10번지
부대시설 국가유산 안내판, 체육시설

연혁

  • 이 생활유적은 동대산(해발 444m)에서 동천 방향(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일대에 분포한다.
  •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이루어진 3차례의 시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삼국시대 구덩이 및 고분, 숯가마, 고려시대 분묘, 조선시대 숯가마 등 여러 시대의 다양한 매장유산이 이곳에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 따라서 매곡동 생활유적은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복합유적으로 이 지역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 이곳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숯가마는 옆쪽에 여러 개의 구멍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측구부탄요라고 부른다.
  • 삼국시대의 숯가마는 철생산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수의 삼국시대 숯가마가 분포하고 있다.
  • 이 때문에 인근의 달천철장과 함께 울산지역 고대 제철기술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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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면으로 7번 국도. 상안사거리에서 우회전. 시장2리사거리에서 좌회전. 매곡산업단지 입구 방면(8Km, 16분소요)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물-발원문 사진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본존상의 측면과 정면의모습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의 모습

현황

관문성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조성시기로 구성
지정현황 국가지정유산(보물) (2021. 12. 22. 지정)
소 재 지 대안4길 280(대안동)
조성시기 1649년(인조 27)

연혁

  •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신흥사 대웅전에 봉안된 대세지-관음보살좌상으로 구성된 삼존상 중 본존상에 해당한다.
  • 복장물 중 발원문, 후령통, 복장직물, 보석류가 본존불과 함께 국가지정유산(보물)로 지정되었다.
  • 본존상의 크기는 상 높이 92.7㎝, 어깨너비 45㎝, 무릎너비 75㎝, 무릎높이 22.7㎝이다.
  • 17세기 전반기 조각승 영색이 불석(拂石, 규산염의 일종으로 흰색의 광물)을 사용해 만든 유일한 기년명 불상이다.
  • 본존상은 짧은 목에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의 자세로, 짧은 상반신에 비해 다리 간격이 넓고 무릎이 높은 편이어서 하체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 얼굴은 방형에 넓적한 편이고,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깊게 팬 입술 가장자리와 볼록하게 올라온 턱에서 온화하면서도 개성 있는 인상이 느껴진다.
  • 장물의 발원문에는 불석의 산지였던 어천(현재 포항 오천읍)에서 돌을 채석하여 신흥사까지 옮겨온 이동 경로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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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구청에서 경주방향 7번 국도, 천곡사거리에서 우회전 매곡로 진입
  • 마우나오션리조트 방면, 기령고개 앞에서 우회전 1.8㎞지점 위치(14㎞, 29분 소요)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 사진1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 사진2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 사진3

현황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 현황 - 지정현황, 소재지, 제작연대로 구성
지정현황 국가등록유산(2022. 06. 09. 등록)
소 재 지 남구 두왕로 277 울산박물관
제작연대 옥중편지(1918년), 상덕태상회 청구서(1915년)

연혁

  • 「박상진 의사 옥중 편지 및 상덕태상회 청구서」는 의열투쟁 비밀단체 ‘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을 역임한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의 유물로, ‘광복회’ 연락거점의 실체와 투옥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 유물은 1918년에 쓰여진 옥중편지(14.0×32.8cm) 1점과 1915년 상덕태상회 청구서(18.5×20.4cm) 1점이 국가등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옥중 편지」는 ‘광복회’가 친일부호 처단 사건 등으로 대거 체포될 당시 투옥된 박상진이 공주 감옥에서 동생들에게 쓴 편지로, 공판을 위해 뛰어난 변호사를 선임 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상덕태상회 청구서」는 미쓰이물산(부산출장소)이 물품의 대금을 요청하는 청구서로, ‘광복회’의 비밀연락 거점지로 삼았던 ‘상덕태상회’의 실체, 규모, 존속기간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이 유물들은 1910년대 국내외 조직을 갖추고 군대양성, 무력투쟁, 군자금모집, 친일파 처단 등 항일 독립운동의 큰 역할을 한 ‘광복회’와 총사령 박상진 의사를 재조명 할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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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유물은 울산박물관(남구 두왕로 277)에 기탁 보관 중
  • 좌석버스 1705, 1703, 1713, 1104, 1401 공업탑 하차, 울산박물관까지 도보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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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 문화체육과
  • 임동미
  • 052-241-7292
  • 최종업데이트 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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